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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만큼 사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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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신석 작성일04-12-23 11:32 조회6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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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의 말씀이다.

흔히들 연로하신 분들이 병상에 누워 긴 투병의 시간을 보내든가 타계를 하면 주위에서 당사자나 가족들을 위로한다며 무심코 던지는 말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애착은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 어떠한 명분이나 이유로도 비난이나 단절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팔순이 넘으신 장모님께서 약 2주일 전에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셔야했다. 병원의 진단결과 뇌경색이란다. 장모님께서는 2년 전에도 심방세동으로 고생을 하셨지만 한 달 전만해도 함께 사시는 큰 딸 네 김장도 하실 정도로 일상생활을 꾸려나가셨다.

그런 장모님께서 의식을 잃고 쓸어져 서울 큰 딸 집에서 내가 사는 대전의 병원으로 입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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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께서는 1922년 개띠로 인천 앞 바다의 작은 섬 장봉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셨다. 그 곳에서 결혼을 하셔서 슬하에 딸 둘을 두셨다. 그런데 장인께서 내 처인 작은 딸이 열 두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장모님께서는 그 이후로 장봉을 떠나 인천으로 삶의 터를 옮기시고 생업의 짐을 떠맡으셔야 했다. 장모님께서는 당신의 처지를 늘 박복하다고 여기시며 ‘여자 개띠라 팔자가 고되다’고 푸념하시고는 하였지만 두 딸이 장성한 후에도 자손들 뒷바라지로 두 손에 물이 마를 새가 없으셨다.

손 위의 동서도 수 년 전에 타계하여 장모님께서는 당신의 노후나 사후의 일이 작은 사위인 나에게 전부 짐이 되실 거라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작은 사위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실만큼 사셨으니 빨리 계절 좋은 꽃이 피는 봄에 눈을 감고 싶다고 구두선이 되게 되뇌이고는 하셨다 한다.

그런 장모님에게 아내가 힘을 내라시며 ‘기력을 찾으시고 내 년 봄 꽃 필 때 돌아가셔도 가셔야 한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장모님께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내가 죽기는 왜 죽느냐. 빨리 치료해서 집으로 돌아가야지’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게 어찌 우리 장모님만의 소망일까. 그런 바램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운동을 하는 이유도 건강하게 삶을 영유하여 병 치례를 줄이고 세상을 마치고 싶은 것이 세상 모두의 바램인 것이다. 이런 소망은 성직자이신 김수환 추기경님도 마찬가지셨다. 아마 김수환 추기경님의 연세도 우리 장모님과 비슷하신 것 같은데 80세 되시는 기념 미사에서 남은 소망 가운데 하나로 당신 발로 화장실을 드나드시다 생을 마치고 싶다는 것이다. 세상 누구나 자신의 생의 마감이 매끄럽기를 바라기는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나 깔끔한 생의 마침을 담보로 조기에 생을 마치기를 주문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요구인 것이다.

지금은 치료 덕분에 조금씩 기동도 하시지만 기억의 많은 부분이 지워졌고 인지 능력도 떨어지셔서 더러는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실 때가 있다.

6인용 병실에서 장모님께서 제일 연장자이시지만 다른 환자들도 대개는 나이가 많고 장모님과 유사한 병환으로 병구환을 하는 가족들이 고생을 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무료한 시간을 그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다 보면 각자의 입장이 다르겠지만 대개는 칠순이 넘으셨던가 간병의 기간이 긴 환자의 가족들은 너나없이 ‘사실만큼 사셨으니’라는 말은 서슴없이 토로하고는 한단다.

그러나 애련함은 정작 사별한 뒤의 가족들의 가슴에 평생 남는 법이다. 당장에는 불편함의 해소로 개운할 것 같지만 잠시라도 가졌던 가족의 타계를 바랬다면 평생 떠나지 않고 원혼처럼 남은 자의 주변을 도는 법이다.

앞으로 장모님께서 병의 징후로 어떤 모습을 보이실지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나는 장모님께서 하루 속히 건강을 회복하시고 오래오래 사시기를 위해 기도를 한다. 병이 나아 오래오래 사시다가 좋은 계절에 돌아가시면 그 게 내 복이고 선영들의 음덕이려니 여기겠지만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될 일인가.

행여 덕담으로라도 ‘이제 사실만큼 사셨으니’라는 말은 당사자나 가족들에게 아예 하지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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