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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가로움을 당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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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병선 작성일04-01-13 14:19 조회5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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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갑자기 한가로움을 당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찌 세속의 부와 출세를 감히 더럽다 하여 주어진 자리를 마다 하고 표표히 떠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그 자리와, 삶의 행위와 방식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기 때문이므로 그 운명과 때의 다름을 빌미로 세상을 차라리 피하는 것이다.

갑오생이니 금년으로 내 나이 이미 꽉 찬 오십(양력으로나 음력으로나, 우리의 나이 셈이나 서양의 그것으로나, 피할 수 없는), 지천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삼단같이 검던 머리 희끗희끗해지고, 무엇인가 마땅하게 할 일도 없는 듯하고, 별로 찾는 이도 없는 가운데 마음만 바쁘고 신산한데... 세월은 쏜 살 같고 혹은 유수와 같이 흘러 안타깝지만 천지신명이 비호한 재주와 용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

아아! 그리하여...
세상에 태어나 이름 석자를 이미 드리웠지만 그 불초함으로 뚜렷한 자취와 功業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

스스로 가만히 돌이키고 생각하니 슬프고 아쉽기 그지 없다.

자연에 몸을 담아 유유자적하던 선인들의 발치에도 가지 못했고, 나름대로 철학이라고 내세울 만한 세상의 이치도 깨치지 못했으며, 그리하여 부끄럽게도 마음이 답답하여 고함치고 싶을 때 즐겨 부르고 읊을 만한 노래 한 소절, 싯귀 하나 제대로 익힌 게 없다.

마음 또한 여리고 옹졸하여 식구들 호구 생각에 제대로 훌훌 떨치고 여행조차 떠날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꿍꿍거리며 삭이고 달리며 상념의 축소와 멸실과정에만 충실하였다.

시대의 흐름은 거스러지 못할 것이라
다시 세상에서 벗어나 한가로움을 당하였으나
마음은 끝내 한가할 수 없어서 조그마한 이해(利害)에도 어긋날 까 마음이 두렵고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의 칭찬이나 비방에도 마음이 쉽게 동요되었다.
간혹 꿈속에서조차 소외됨의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잠이 깨면 다시 그들을 찾아 관계를 돌이킬 방도를 애써 궁리하였다.

그리하여,
때로 무리들과 어울리며 같이 마시고 즐거워하다가도 갑자기 기울이던 잔을 멈추고 숨을 죽이며 혹시 아집의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 거기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간혹 술자리에 아예 나가지 않거나 나가서라도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빠져 나온 까닭은 이런 연유이었으니 존경하는 走林道伴들은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시라!)

봉황이 세상을 넘어 멀리 날 듯, 매미가 허물을 벗듯, 초연히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 자연속에서 소요하며 자적했던 어질고 지혜롭던 옛 사람들과 나를 비교해 보니 그들의 총명함과 나의 어리석음의 차이가 하늘과 땅의 차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내 이미 세상의 번잡함을 떠나 고요한 데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달리기였으니 그것이 아니었으면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고, 흥을 붙이었으며, 또한 사랑하는 동무들을 알고 사귀었겠는가!

달리기는 그리하여 한가로움을 당한 나의 일상에서 하나의 정업(靜業)이 되고 말았다.

그것으로 세상을 살아내며 불현듯 마주치는 시름과 근심을 달래고 때로 잊을 수 있었으나 이제 그 달리기로 인하여 자주 마음을 상하고 정신이 산란하며, 세상과 사람을 편견의 창을 통해 바라보게 되었으니 이 또한 세상을 떠나 홀로 지내는 세월 속에 그렇치 않아도 비좁은 마음에 병이 깊은 까닭이리라!!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다. 백번을 고쳐 생각해도 마라톤을 제대로 한 게 아니고 그저 흉내만 낸 것 같다.

자책이 이미 깊은 병을 치유할 수 있으리요만
무심한 세월은 오늘도 강처럼 흐른다. 도도하고도 무섭게 흘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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