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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과 예술(藝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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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우 작성일01-02-16 00:58 조회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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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藝術)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한정해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의 형태를 어떤 표현형식을 빌어 표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예술은 왜 필요한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단순한 의미의 예술을 무시하고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바탕적인 요소에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그 어떤 것을 추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꾸미고자 하는 감각적인 미(美)가 필요하게 된다.
생활에 어떤 미적 요소를 가미(加味)하게 된 곳에서
우리는 예술의 필요성을 느끼기에 그것을 창조하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즉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는 생각할 줄 아는 여유(餘裕)와 감각(感覺)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것은 사유(思惟)할 수 있고 느낄 줄 아는 가장 진화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연 현상에 의해 [비가 온다]는 사실 앞에서
다른 동물들은 단지 비를 피하기에 급급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흠뻑 맞는 경우가 흔하다.
동물 중에 IQ가 높다는 침팬지마저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동굴 속이나 나무 밑으로 피신(避身)하는 것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비가 올 것을 대비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
또한 그 집을 기능적으로 편리하면서도 보기 좋게 설계해서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건축 예술로써 오랜 세월동안 갖가지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되어 온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집 속에서 비가 온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각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시인(詩人)이라면 느끼는 감정에 따라 풍부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것이다.
화가(畵家)라면 그 상황을 역동적인 붓끝에 따라 켄퍼스위에 그려낼 것이다.
음악가(音樂家)라면 비오는 그 형상과 소리를 오선지(五線紙)에 나타내려 할 것이다.

이렇듯 비가 온다는 단순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다양한 착상(着想)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그 것을 가장 아름답게 승화시켜 표면적으로 표출하려 한다.
즉 그것을 느끼는 상황은 거의 동시이지만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유(思惟)할 수 있는 여유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나타낸 것이다.
정신이 여유로우면서 타고 난 재능을 가졌다면
그것을 더 심도 있게 접근해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지만,
급박하거나 단순한 생각으로 그 상황을 접하게 된다면
그냥 스쳐 지나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심적인 여유가 있어야 그것을 창작하려는 노력이 뒤따를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자신이 적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표출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것이 적절하게 승화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것을 우리는 예술 창작활동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한 부분까지 예술가는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분야에 따라 훌륭하게 나타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들으며, 만지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에 심취되어 심적으로 차원 높은 정화(精華)를 얻게 된다.

예술가는 그 시대에 따라 그 역할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가인 차이콥스키(Pyotr Ilich Chaikovskii, 1840∼1893)가
[백조의 호수]라는 아름다운 발레곡을 작곡했지만,
그가 영원히 살면서 그 곡을 연주하며 지휘할 수는 없다.
그는 단지 그 시대에 맞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갔다.
하지만 그가 오선지(五線紙)에 남겨 놓은 [백조의 호수]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남아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선지에 표현되어 있는 그런 곡들이 어떤 노력도 없이 보기만 한다고 해서
감명(感銘)을 받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그 곡들을 해석해서 지휘할 줄 아는 지휘자(指揮者)가 있어야 하고
그것에 융화(融化)되어 연주할 줄 아는 연주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여기서 지휘자가 단순히 그 악보(樂譜)에 따라 충실하게 지휘한다면
그 것은 로봇에 불과할 뿐이다.
지휘자는 그 음악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그 연주곡목에 자신의 예술혼(藝術魂)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슬픈 장면의 곡을 연주하게 한다면
자신이 그 것에 완전히 심취되어 울 것같은 자신의 심정을
예술혼으로 승화시켜 지휘를 해야만, 관객이 함께 동조(同調)하면서 환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곡가가 작곡해놓은 아름다운 곡에
그것을 해석하는 지휘자의 예술혼이 들어가고 연주자가 같이 융화되어 줄 때
명지휘(名指揮) 명연주곡(名演奏曲)으로 남게 되는 것과 같다.
만약 그것이 발레곡이라면
거기에 화려한 무대 장식과 어울러진 수준 높은 발레리나들의 테크닉과 통일성이
겸비되어야만 시간예술로써 음악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에 수원문화예술회관에서 감상하게 된 [백조의 호수]는
여러 가지로 나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컸다.

민족주의 음악가인 차이콥스키의 예술적 의욕이 강하게 담긴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의 전설 [나뭇꾼과 선녀]가 연상되는 러시아 [백조의 전설]에
안데르센(Hans Christsian Adersen, 1805∼1875) 동화, [야생 백조들]을 결합한 것으로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인 푸쉬킨(Aleksandr Pushkin 1799 -1837)의 단편
[살탄 황제] 영향을 강하게 받은 '슬라브 민족의 혼'을 지닌 작품(作品)이다.

이번에 리틀엔젤스 산하(傘下)
유니버샬발레단이 경기도립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한 이 작품을
털보 지휘자 님의 배려로 로얄석에서 큰 딸아이와 함께 감명 깊게 감상할 수 있었다.

숨죽일 듯이 펼쳐지는 백조들의 통일성 있는 군무(群舞)와 어울려지는 아름다운 선율은
객석(客席)에 앉아 있는 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
흔히들 [백조의 호수]하면 러시아의 볼쇼이 발레단 아니면 키에프 발레단을
연상(聯想)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들의 민족음악으로 그것을 그들이 아름답게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에 공연된 그것은 그들과 다른 측면에서
그것을 해석해서 화려하게 공연되고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백조의 호수]하면
소재면에서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共存)하는 반면,
형식면에서 고전발레의 구성 틀을 고수(固守)하고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낭만발레로도, 고전발레로도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낭만발레의 특징적 무대배경, 호수와 달빛이 있는 숲속에서 생긴 비현실적인 사랑이야기는
[지젤]의 그것과 흡사(恰似)하며
화려하게 함께 스텝을 맞추는 것과 파티 장면중에 막간(幕間)의 여흥(餘興)은
여느 고전발레의 그것과 같은 점이 이 발레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觀客)은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오갈 수 있고
그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만끽(滿喫)하게 된다.
이것이 갖는 이 매력(魅力)이야말로 한 세기를 지나오면서
관객과 안무(按舞)가 모두를 사로잡은 발레의 진미일 것이며
공연횟수나 유명도를 감안한다면 발레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세계 유명발레단들이 이 작품을 공연하는 것을 거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공연한 유니버샬발레단은
세계 수준의 발레단만이 연출할 수 있는 테크닉과 통일성을 필요로 하는 19세기 클래식을
무대에서 자신감 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배경막(背景幕)으로 사용되는 산에 독특하게 그려진 가을 낙엽 빛깔의 세트부터
잔잔한 호수를 가로지르는 백조들의 미끄러짐과
금테를 두른 빛나는 샹들리에가 있는 궁중 장면 모두가
입이 저절로 벌어질 만큼 아름답고 화려하기만 했다.

여기에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지젤]등의 발레곡 명지휘로
이미 정평이 나있는 털보 지휘자님의 지휘로 융화(融化)된 연주는
발레음악의 진수(眞髓)를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흔히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다 "공연은 짧고 감흥은 길다."를 덧붙이고 싶다.

급박하게 재촉된 톱니바퀴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일지라도
물질의 풍요를 내세워 정신적 빈곤을 감수(甘受)해야 한다면
여느 동물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예술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의 궁극적 목적인 내적정화(內的精華)를
스스로 창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라톤은 한계 상황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내적인 정화(精華)이다.
이것은 인간이기에 어려움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동물들이 취미로 뛴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생존을 위해서 뛸 뿐이지
그들의 한계상황을 시험하기 위해서 달리지는 않는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대부분의 관중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는 선두그룹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다 할지라도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면서 내적정화(內的精華)를 느끼려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신체예술(身體藝術)의 한 형태일 것이다.


송파세상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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