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마라톤-방관자로서 자유와 참여자로서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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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우 작성일00-09-30 00:33 조회1,6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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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무관심 속에 지낼 수 있지만
관심 속에 방관자적 태도로 사태 추이를 지켜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과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먼저 어떤 일에 무관심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자신과 주위사람이
그 일에 거의 관련이 없거나 그 일에 대한 사태 파악이 안된 상태이다.
이 것은 무관심함으로써 그 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주위가 소란스럽거나 격론이 벌어져도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방관자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음은 관심 속에 방관자적 태도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부류이다.
이 부류는 여러 갈래로 나눌 수 있으나,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하는 경우와 기회에 따라 자신의 뜻을 소극적으로 표출하는 경우로,
크게 두 가지로 한정하여 말할 수 있다.
먼저 관심 속에 방관자적 태도를 끝까지 고수하여 외견상으로 무관심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부류이다. 이 부류는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심정적인 동요를 일으킬 수 있으나
실행에 옮기기에는 소극적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방관함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즉, 애써 무관심 하는 척 함으로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거북하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이것은 어떤 일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경향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들은 성향을 묻는 투표나 선거, 또는 여론조사에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즉 자신의 실체를 내놓고는 어떤 일에 개입하여 반응하기는 꺼리지만
무명으로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부류이다.
다음으로 방관자적 태도를 일관하지만 기회에 따라 자신의 뜻을 표출하는 부류이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이는 어떤 일에 소극적인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면서도
방관자로서 정신적인 제약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즉 자신의 뜻을 한정적으로 표출은 했으나
그 뜻에 책임지기를 싫어한다. 이는 객관적으로 방관자로서 자유로울 수 있으나 주관적
자유는 어느 정도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일에 격론이 벌어지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격론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곳에서나 또는 무명으로 자신의 뜻을 표출한다. 설사 그 뜻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책임부담은 없다. 이는 침묵함으로서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벗어나 방관자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격론에 대한
직접적인 방향제시에 참여하지 못하기에 오는 주관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개입하는 부류이다.
이 부류는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일에 참여함으로서 방관자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지만 참여자로서 그 책임이 수반된다.
즉 개혁세력 또는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부류인데
정체된 현실을 새로운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일을 추진하려 한다.
여기에는 많은 저항이 있기 마련인데, 추진하는 의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만남의 광장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방관자로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논쟁에 참여해서 자신의 뜻을 말하지 못해 받는 정신적 제약이 항상 내 곁에 있었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아무 말이나 해놓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좋게 평하면 논쟁을 즐기지 않는 것이고, 다른 각도로 말하면 논쟁에 방관함으로서 논쟁에
대한 책임을 면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울트라마라톤협회건에 대해 만남의 광장에서 많은 격론이 벌어질 때,
방관자로 일관하다, 협회창립에 대해 포기를 선언해버리자,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는
몽골100km 울트라맨 이용식님에게 개인적으로 이 메일을 보내
울트라협회를 계획했던 대로 창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지금은 때가 이르기에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 때가서 추진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지금 서울마라톤클럽 사이트에 한반도 횡단팀 정해성님의 완주기가 연재되고 있다.
그 글을 읽으면서 가슴 한자리에 계속해서 염려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시도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한반도 횡단에 함께 참가했던 분들이
내년에 48시간이내에 모두 완주할 목표로 다시 시도할 것으로 믿고 있지만,
이것을 연례행사로 주관하는 단체가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울트라협회가 결성되어 어느 단체와 공동주관하든 단독으로 개최하든
한반도 횡단과 같은 울트라 대회가 일반 마라토너에게 연례적으로 익숙해졌으면 한다.
방관자로서 자유를 누렸으나 본인 스스로 이에 대해 부자연스러워해야만 했었다.
이미 토론이 끝나버린 일을 다시 들춰내는 자신을 보면서
참여자로서 그 책임을 생각하게 된다.
송파세상 김현우
관심 속에 방관자적 태도로 사태 추이를 지켜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과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먼저 어떤 일에 무관심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자신과 주위사람이
그 일에 거의 관련이 없거나 그 일에 대한 사태 파악이 안된 상태이다.
이 것은 무관심함으로써 그 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주위가 소란스럽거나 격론이 벌어져도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방관자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음은 관심 속에 방관자적 태도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부류이다.
이 부류는 여러 갈래로 나눌 수 있으나,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하는 경우와 기회에 따라 자신의 뜻을 소극적으로 표출하는 경우로,
크게 두 가지로 한정하여 말할 수 있다.
먼저 관심 속에 방관자적 태도를 끝까지 고수하여 외견상으로 무관심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부류이다. 이 부류는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심정적인 동요를 일으킬 수 있으나
실행에 옮기기에는 소극적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방관함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즉, 애써 무관심 하는 척 함으로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거북하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이것은 어떤 일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경향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들은 성향을 묻는 투표나 선거, 또는 여론조사에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즉 자신의 실체를 내놓고는 어떤 일에 개입하여 반응하기는 꺼리지만
무명으로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부류이다.
다음으로 방관자적 태도를 일관하지만 기회에 따라 자신의 뜻을 표출하는 부류이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이는 어떤 일에 소극적인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면서도
방관자로서 정신적인 제약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즉 자신의 뜻을 한정적으로 표출은 했으나
그 뜻에 책임지기를 싫어한다. 이는 객관적으로 방관자로서 자유로울 수 있으나 주관적
자유는 어느 정도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일에 격론이 벌어지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격론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곳에서나 또는 무명으로 자신의 뜻을 표출한다. 설사 그 뜻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책임부담은 없다. 이는 침묵함으로서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벗어나 방관자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격론에 대한
직접적인 방향제시에 참여하지 못하기에 오는 주관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개입하는 부류이다.
이 부류는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일에 참여함으로서 방관자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지만 참여자로서 그 책임이 수반된다.
즉 개혁세력 또는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부류인데
정체된 현실을 새로운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일을 추진하려 한다.
여기에는 많은 저항이 있기 마련인데, 추진하는 의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만남의 광장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방관자로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논쟁에 참여해서 자신의 뜻을 말하지 못해 받는 정신적 제약이 항상 내 곁에 있었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아무 말이나 해놓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좋게 평하면 논쟁을 즐기지 않는 것이고, 다른 각도로 말하면 논쟁에 방관함으로서 논쟁에
대한 책임을 면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울트라마라톤협회건에 대해 만남의 광장에서 많은 격론이 벌어질 때,
방관자로 일관하다, 협회창립에 대해 포기를 선언해버리자,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는
몽골100km 울트라맨 이용식님에게 개인적으로 이 메일을 보내
울트라협회를 계획했던 대로 창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지금은 때가 이르기에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 때가서 추진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지금 서울마라톤클럽 사이트에 한반도 횡단팀 정해성님의 완주기가 연재되고 있다.
그 글을 읽으면서 가슴 한자리에 계속해서 염려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시도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한반도 횡단에 함께 참가했던 분들이
내년에 48시간이내에 모두 완주할 목표로 다시 시도할 것으로 믿고 있지만,
이것을 연례행사로 주관하는 단체가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울트라협회가 결성되어 어느 단체와 공동주관하든 단독으로 개최하든
한반도 횡단과 같은 울트라 대회가 일반 마라토너에게 연례적으로 익숙해졌으면 한다.
방관자로서 자유를 누렸으나 본인 스스로 이에 대해 부자연스러워해야만 했었다.
이미 토론이 끝나버린 일을 다시 들춰내는 자신을 보면서
참여자로서 그 책임을 생각하게 된다.
송파세상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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